2007년 12월 17일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실제로는 다른 주제여서 쓸 기회가 없었지만, 만약 나에게 '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에 대해 써라'라는 에세이 주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빠에 대해 썼을 것이다. 아주 태어났을 적부터 항상 내 곁에 있었고 항상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분들이 부모님이기 때문에 (특히 유전자의 반을 물려받았기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하루하루 자라오면서 나에게 항상 끊임없는 처절한 노력을 하게 한 것이 바로 우리 아빠이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어렸을 때 어떻게 자라오셨는지, 살면서 어떤 크고 작은 일이 있으셨는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격상 그냥 현재에 관한 것이던 과거에 관한 것이던 자기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알 길이 없었고, 글쎄.. 나도 그런 것에 대해 딱히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어릴 적부터 항상 들어왔던 것은 아빤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과 많이 다른 시대에 태어나셔서 그 당시에는 공부던 뭐던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하는 그런 때였지만, 아빠께선 특히 더 혼자 독립적으로 모든 일을 해나가셨다고 한다.
그런 아빠의 철학은 말하시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우러나온다. "학원같은 건 다녀서 뭐하냐.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해야지," "명강의 들으면 다 이해되고 문제 다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지? 근데 백날 강의 들어봤자 스스로 문제 안 풀어보면 시험문제 봤을 때 풀 것 같으면서도 절대 못 풀어." 아빤 맨날 누누이 나와 내 동생들에게 또 때로는 엄마께 이런 얘기들을 하신다. 그래서 '당신이 수학, 과학 전문가니깐 애들 좀 가르쳐 줘보라'는 엄마의 바가지에도 꿋꿋이 나나 내 동생 책상 옆에 앉아 신문이나 타임지를 보신다. -_-;; 물론 물어보면 당연히 가르쳐 주시기야 하지만 문제를 일일이 풀어주신다거나 그러지는 않으신다. 완전 멍청한 시간 낭비라 하시면서. 이렇게 아빠는 나에게 항상 혼자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고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가르쳐 주셨고 나 또한 이제는 그게 더 익숙해져 누가 강의하는 것을 듣는 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강의는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구나 하며 흐름을 파악하는 수단일 뿐이지, 결국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은 혼자 책상에 앉아 차근차근 책을 보는 것이다. 내가 이미 이해한 부분은 빨랑빨랑 넘어가고 잘 모르겠는 부분만 찬찬히 집중적으로 보는거지 뭐. 하긴 이건 모든 사람이 그러겠지만ㅋㅋㅋㅋㅋ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기본적 마음가짐과 자세를 심어주신 아빠는 내 독서 경향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셨다. 어렸을 때부터 매주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산더미처럼 빌려와 다같이 코를 파뭍고 독서를 했던 우리 가족.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지하에 있는 아동용 코너에서 빌릴 책을 골랐던 나에게 오기를 심어준 사람은 바로 아빠였다. "그렇게 줄여놓은 책 읽으면 뭐 재밌냐? 원본을 읽어야 제대로 맛이 나지." 정확히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초등학생 용으로 줄거리 위주로 요약을 한 어떤 책을 읽고 있었던 나에게 아빤 말하셨다. 분명히 명령도, 권유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물음이었을 뿐이다. (물론 약간의 의도가 섞여있긴 했지만.) 그러나 순간 이 말을 들은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뭐든지 욕심이 많았던 나는 내가 그 책의 재미를 원래 있는만큼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에 화가 나, 그 다음 주부터 도서관에 갔을 때에 항상 혼자 2층 일반 코너로 올라가시던 아빠를 쫄쫄 쫓아다니면서 원본 그대로 번역을 하지 않은 책은 손도 대지 않았다. 다시는 줄여진 '아동용'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줄거리만 나열한 초딩용 소설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 문학적 묘미를 어설프게나마 접할 수 있었는 계기다.
또 결정적으로 내가 수학, 과학에 겁을 내지 않게 한 것도 아빠다. 중학교 때까지 나에게는 이과적 기질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두자리 수 뺄셈을 할 때 10을 빌려와 계산을 하는 그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 낑낑댔고, 옆에서 구경삼아 설명을 듣던 동생은 "아, 이거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 아니야?"라고 쉽게 이해하는 수학 문제도 수 십번을 설명해야 겨우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중학교에 들어가 컴퓨터를 계속 하려면 집에서 영어, 수학, 과학 공부를 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 하셨던 엄마의 말씀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누가 설명을 해줘도 힘들어 죽겠는데 혼자 그걸 다 하라니.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유없이 오기가 생겨서 수학의 정석 '기본'을 사지 않고 바로 '실력'을 샀었다. 무슨 똥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처음 제대로 공부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수학에 파고들었고 역시나 다를까 너무 어려워 죽는 줄 알았다. 수학 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과학은 하이탑 물리부터 시작했는데 어찌나 골치아프던지. 뭔 놈의 이상한 야시꾸리한 기호들이 그렇게나 많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줄줄이 써 놓았는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하다 결국은 SOS!!! "아빠, 이거 어떻게 풀어?"
내가 그토록이나 어려워했던 그 문제는 바로 경사면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받는 힘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때 난 물체가 경사면에 수직으로 받는 항력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는데, 내가 문제 옆에 끄적끄적 그려 놓은 그림과 그 힘들을 힐끗 보곤 아빠, 입을 여셨다. "수직항력 어딨어." 아.... 왜 아빤 이렇게 금방 아는 걸 난 맨날 모르는 거지? 물론 아빠는 기계 공학과 교수이고 난 그 때 갓 물리에 세계에 첫 발을 디딘 중딩 1학년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비교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난 아빠에게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안그래도 이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 나에게 아빠께선 한 방 더 어퍼컷을 날리셨다. "근데 뭐 이런 거 어렵냐??? 별거 아니잖아" 아놔.... -_-;; 좀 많~이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아빠 말은 곧 진리요 생명이니라 굳게 믿었던 난 그냥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수학하고 물리 별거 아니야. 그냥 좀 더 하면 되겠지.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공순이가 된 것이다. 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우리 가족은 다 아이큐가 똑같다. 정확한 숫자를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 학교 평균보다도 낮고 절대로 머리가 좋다고는 불릴 수 없는 숫자이다. 그래서 정보올림피아드를 할 때에도 다른 친구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위축이 되고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때 단체로 IQ 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왔을 때 또 한번 실망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렇게 나랑 수치적으로 머리가 비슷한 아빠는 나보다 뭐든지 다 잘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힘들게 힘들게 하는 것도 아빤 항상 슬렁슬렁 하셔도 훨씬 쉽게 잘 해내셨다. 아빠 주장에 의하면 자기는 서울대도 그냥 대충 성적 보니깐 들어갈만 해 보여서 될 줄 알았고 MIT에서도 전공 시험을 봤었는데 그 과목 교수가 '규정상 A+ 이상의 점수를 없어서 미안하다'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자기가 하도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잘 가르쳐서 강의평가 엄청 좋게 나온다신다. 그렇게 아빤 항상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을 끝내주게 힘들이지 않고 잘하셨고 지금까지 쭉 그래오셨다. 왜 주어진 머리의 능력은 같아 보이는데 해내는 성과는 이렇게 다른거지?ㅠ
내가 더 열이 받는 사실은 내가 정말 아빠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성격도 그렇고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보고 배운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똑같다. 근데 도대체 난 왜 이 모양인 것인가ㅠ 에효~ 아빤 살면서 별 그렇게까지 뭔가를 해내는데 있어 힘든 적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은데, 난 모든 것이 다 힘들어 죽겠다. 중학교 때 컴퓨터 공부하는 것도 늦게 시작해 아둥바둥 따라가느라 죽을 맛이었고,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영어를 하도 못해서 3학년 거의 끝날 때 될 때까지도 맨날 징징거릴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앞으로 미국에 가서도 헉헉대며 따라가다 못해 질질 끌려가느라 진짜 쩔게 힘들겠지;; 공부도 엄청 빡세게 시킨다는데. 에효~~~~ㅠㅠ
뭐 한 가지 아빠와 나에게 큰 다른 점이 아빠는 사회성이 짱이라는 점이다. 난 약간 외골수적인 면이 있어 나랑 관련된 일 아니면 잘 신경을 못 쓰고 머리 처박고 뭐 하나에 빠지는데, 아빠께선 다른 사람들을 잘 이끄는 리더십이 있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잘 배려해 항상 인기가 많으시다. 학교에서 학생들이랑도 잘 어울려 노실 줄 아는 교수님이라 인기도 꽤 많은 것 같으시댄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을 때 독서를 하거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시간을 유용하게 잘 쓰실 줄 아신다. 항상 혼자 잘 놀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에게 강조를 하시는 아빠께선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 없어도 언제나 즐길 줄 아는 분이다.
음음. 그래서 결론은 난 아빠를 진짜 무지 존경하고 내가 지금까지 자라오는 동안 이렇게 키워주신 것에 정말 많이 감사하다는 거다. 항상 여유롭게 혼자서도 삶을 즐길 줄 알고 독립적으로 모든 것을 해 나가는 그런 자신감, 학문적 목표의 성취와 그에 대한 만족감, 또 너무 세속적이지 않고 자기 소신과 명예를 지킬 줄 아는 의지. 이렇게 항상 거대하다고 느꼈던 아빠가 공부하셨던 학교에 나도 자연스럽게 first choice로 지원을 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는 생각은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책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드는 생각이다) 내가 여태까지 너무 아빠의 그늘에 드리워 나 자신만의 모습을 찾지 않으려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학교에서 이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져 아직까지도 실감이 안나고,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자랑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뿌듯한 성취감 뒤에 이상야릇한 끝맛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글쎄, 아마도 이젠 태어났을 때부터 얽매여왔던 아빠에 대한 약간의 열등감, 그리고 경쟁심이란 족쇄를 부수고 나만의 비상을 할 때가 왔나보다.
# by | 2007/12/17 11:54 | Journal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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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다 ㅋㅋㅋ 학구적인 가풍 ㅋㅋ 그리고 웅쌍 넌 대단해. ㅋㅋㅋ
강의는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구나 하며 흐름을 파악하는 수단일 뿐이지, 결국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은 혼자 책상에 앉아 차근차근 책을 보는 것
공감!!
"근데 도대체 난 왜 이 모양인 것인가ㅠ 에효~"라고 말하는 MIT 합격자
It's about time. ^^
은하이> 그닥 학구적은 아닌데.. 좀 써 놓고 보니깐 그렇게 보였네 ^^;;
디제이> ㅋㅋㅋㅋ 역시 너도 공돌이~
떼띨> 떼띨은 비상 정도가 아니라 우주를 뚫고 나갈거야!
쏠> 별로 잘 못써ㅠ 맨날 길기만 하지 ㅎㅎ
와녁> 아무리 그래봤자 와녁이보다 안 간지 ㅋㅋㅋㅋㅋ
diana> yeah, i think so too. ^^*
마이구미> 키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