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07일
미운 정
학교에서 지엘피에스를 하는 동안 나는 박해에게 졸라서 '거침없는 고딩들의 일본 탐험기' 책을 한 권 얻었다. 물론 그냥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인터넷 주문을 할 수도 있었지만, 뭐 친구 좋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냥 '우리도 책 한 권씩 줘~줘~~'하고 땡깡을 부렸더니 역시 착한 박해는 그냥 책을 가져다 주었다. (박해 고마워! ^^*)
아마 그 연두빛이 나는 반들반들한 네모 모양의 종이 묶음을 내 손에 쥐게 된 것은 캠프가 끝날 무렵이었다. 하루하루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무료하게 바닥으로 내린 침대 매트리스 위에 벌렁 누워서 컴퓨터도 인터넷도 지겨워진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이 책은 드넓은 벌판에 홀로 심심하게 앉아있던 꼬마 아이가 우연히 발견한 개미집 같이 엄청난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이미 인터넷에서 저자 소개를 본 후라, 나는 분명히 그 굉장한 저자들만큼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란 기대에 가득 찼다. 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첫 책장을 넘겼다.
프롤로그. '이심전심'을 이루며. 알록달록한 색깔로 첫 장의 제목이 씌여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귀여운 모자를 쓴 다은이의 얼굴이 스티커처럼 얹혀 있었다. 피식 웃음 한 번 날려주고, 촤아악ㅡ 3초만에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책장을 날려주었다. 그 짧은 시간 속에 있던 까맣고 가는 글자들 사이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친근한 이름들, 가끔씩 넘기던 종잇장을 멈추게 하는 재미있는 표정의 사진들, 그리고 내 눈을 끌어당기는 여러 자극적인 제목들. 아직 책을 읽기도 전인데 나는 벌써 즐거워졌다.
이제 예고편을 봤으니 마음을 다잡고 본편을 볼 시간이 되었다. 일단 먼저 소파에 지익 누워 가장 게으른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쿠션을 받쳐 머리카락을 다 뒤로 넘겨 성가신 모기처럼 목에 따끔거리며 달라붙지 않게한 후 마지막으로 머리 바로 위에 있는 형광등을 켰다. 오케이~ 준비 완료! 드디어 눈알을 굴릴 시간이 온 것이다.
.....
.....
.....
마지막 장의 마침표까지 눈도장을 찍은 후 흐리멍텅한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시침은 60도가 약간 안 되게 움직인 후였고 분침은 원래 있던 자리를 두 번 지나칠락 말락한 상태였으며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하늘 색깔은 주홍과 빨강 그라데이션에서 청남색으로 바뀐 후였다. 장난기 어린 호기심으로 꽉꽉 차있던 내 마음에는 그새 잔잔한 차분함이 그득히 고였고 새삼 발견한 친구들의 글솜씨와 놀라운 경험들에 대한 동경이 물씬 올랐다.
책을 읽으면서 네 친구들의 추진력, 열정, 익살스러운 우여곡절들, 새로운 체험 등이 정말 많이 부러웠다. 3살 때 보스톤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후로 한반도 너머로 발을 디딘 적은 4학년 때 걸스카우트에서 갔던 제주도 여행, 고등학교 1학년 때 갔던 네팔 봉사활동, 그리고 그 바로 다음 해 학교에서 단체로 간 미국 수학여행 딱 그렇게 세 번 밖에 없는 나로써는 그렇게 독립적이고 계획적으로 친구들끼리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다할 수 있는 일본 여행을 갔다온 것이 대단해보였다. 항상 안전하고 편한 것만 선호해 바쁜 시기에 일을 하나 더 만들어서 내 몸을 피곤하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였다면 절대로 해낼 수 없었던 일을 이룬 친구들이 존경스러웠던 것이다. 또 팀을 짜는 과정부터 학교 학술제에서 발표를 하는 순간까지의 모든 에피소드들 각각이 다 통통 탄력있고 튼튼한 진심어린 문장이란 실로 짜여져 하나의 멋진 목도리, 장갑, 혹은 스웨터가 된 것도 너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보다도 더 부럽고 더 공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오랜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쌓인 네 친구들 사이의 정이다. 같이 고생을 하고 많은 것을 이루면서 쌓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생긴 고운 정이던 서로 툭탁거리며 때로는 큰 소리까지 치면서 싸우고 토라지는 동안 새벽녘에 소리없이 내리는 서리처럼 쌓인 미운 정이던 평생 학교를 벗어나도 머리 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을 사이들 아닌가?! 그냥 심심할 때 툭툭 시비도 걸 수 있고 때때로 화가 벌컥 나게 행동을 해도 어느새 그냥 다시 돌아보면 '으이그~' 하면서 챙기게 되는 '웬수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 것 같다. (박해가 책에 쓴 말을 빌렸다.)
내가 이렇게 미운 정이 쌓인 사람들에 대한 동경을 가지는 것은 내가 살면서 그 누구와도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마찰이 생길까 싶으면 일이 골치 아파지는 것도 싫고 괜한 일에 신경쓰는 것이 귀찮아질까봐 대충 먼저 참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주는 것을 싫어해서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튀거나 거슬릴만한 행동은 자제해 애초부터 불화의 씨를 짓밟아버린다. 그래서 집에서도 동생들이랑 한번도 싸운 적이 없었고 12년지기 친구와도 지금껏 약간이라도 의견 충돌이 있어 감정이 상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탄한 관계만을 유지하다보니 약간 이제는 이런 아무 기복없이 거의 직선에 가까운 인간 관계 그래프가 지루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하다는 감이 없지않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친구들이 이성친구와 틱틱대며 신경전을 벌인 후 방에서 씩씩거리며 열받아 하는 것을 보아도 왠지 꽤 스릴있고 재미있어 보인다는. ^^;;
어쨌든 정말 오랜 기간동안 고생하면서 소중한 기억들도 많이 만들고 대단한 성과까지 이룬 친구들에게 축하하다고, 그리고 지루해 죽을똥말똥 하던 나에게 잠시동안 재미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할 거리를 선사해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졸업파티 때 만나면 책 잘 읽었다고 이야기해 줘야지. 책까지 그냥 공짜로 갖다 준 박해에게 특히 더!!!
그나저나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바로 블루베리 푸딩 이야기였다. 읽으면서 자꾸 그 당사자들의 표정이 절로 떠오르는데 어찌나 상상을 안하고 싶던지...! ㅠㅠ 내가 푸르딩딩 연두색 책을 열심히 눈알을 돌려대며 읽는 것을 본 현우도 내가 다 읽은 후에 책을 집어들어 새벽 5시까지 책장을 넘겼다고 하는데, 현우 역시 그 푸딩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면서 매우 인상깊었다고 했다. 너무 엽기적인 이야기였어. ㅉㅉ
아마 그 연두빛이 나는 반들반들한 네모 모양의 종이 묶음을 내 손에 쥐게 된 것은 캠프가 끝날 무렵이었다. 하루하루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무료하게 바닥으로 내린 침대 매트리스 위에 벌렁 누워서 컴퓨터도 인터넷도 지겨워진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이 책은 드넓은 벌판에 홀로 심심하게 앉아있던 꼬마 아이가 우연히 발견한 개미집 같이 엄청난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이미 인터넷에서 저자 소개를 본 후라, 나는 분명히 그 굉장한 저자들만큼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란 기대에 가득 찼다. 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첫 책장을 넘겼다.
프롤로그. '이심전심'을 이루며. 알록달록한 색깔로 첫 장의 제목이 씌여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귀여운 모자를 쓴 다은이의 얼굴이 스티커처럼 얹혀 있었다. 피식 웃음 한 번 날려주고, 촤아악ㅡ 3초만에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책장을 날려주었다. 그 짧은 시간 속에 있던 까맣고 가는 글자들 사이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친근한 이름들, 가끔씩 넘기던 종잇장을 멈추게 하는 재미있는 표정의 사진들, 그리고 내 눈을 끌어당기는 여러 자극적인 제목들. 아직 책을 읽기도 전인데 나는 벌써 즐거워졌다.
이제 예고편을 봤으니 마음을 다잡고 본편을 볼 시간이 되었다. 일단 먼저 소파에 지익 누워 가장 게으른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쿠션을 받쳐 머리카락을 다 뒤로 넘겨 성가신 모기처럼 목에 따끔거리며 달라붙지 않게한 후 마지막으로 머리 바로 위에 있는 형광등을 켰다. 오케이~ 준비 완료! 드디어 눈알을 굴릴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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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의 마침표까지 눈도장을 찍은 후 흐리멍텅한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시침은 60도가 약간 안 되게 움직인 후였고 분침은 원래 있던 자리를 두 번 지나칠락 말락한 상태였으며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하늘 색깔은 주홍과 빨강 그라데이션에서 청남색으로 바뀐 후였다. 장난기 어린 호기심으로 꽉꽉 차있던 내 마음에는 그새 잔잔한 차분함이 그득히 고였고 새삼 발견한 친구들의 글솜씨와 놀라운 경험들에 대한 동경이 물씬 올랐다.
책을 읽으면서 네 친구들의 추진력, 열정, 익살스러운 우여곡절들, 새로운 체험 등이 정말 많이 부러웠다. 3살 때 보스톤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후로 한반도 너머로 발을 디딘 적은 4학년 때 걸스카우트에서 갔던 제주도 여행, 고등학교 1학년 때 갔던 네팔 봉사활동, 그리고 그 바로 다음 해 학교에서 단체로 간 미국 수학여행 딱 그렇게 세 번 밖에 없는 나로써는 그렇게 독립적이고 계획적으로 친구들끼리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다할 수 있는 일본 여행을 갔다온 것이 대단해보였다. 항상 안전하고 편한 것만 선호해 바쁜 시기에 일을 하나 더 만들어서 내 몸을 피곤하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였다면 절대로 해낼 수 없었던 일을 이룬 친구들이 존경스러웠던 것이다. 또 팀을 짜는 과정부터 학교 학술제에서 발표를 하는 순간까지의 모든 에피소드들 각각이 다 통통 탄력있고 튼튼한 진심어린 문장이란 실로 짜여져 하나의 멋진 목도리, 장갑, 혹은 스웨터가 된 것도 너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보다도 더 부럽고 더 공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오랜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쌓인 네 친구들 사이의 정이다. 같이 고생을 하고 많은 것을 이루면서 쌓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생긴 고운 정이던 서로 툭탁거리며 때로는 큰 소리까지 치면서 싸우고 토라지는 동안 새벽녘에 소리없이 내리는 서리처럼 쌓인 미운 정이던 평생 학교를 벗어나도 머리 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을 사이들 아닌가?! 그냥 심심할 때 툭툭 시비도 걸 수 있고 때때로 화가 벌컥 나게 행동을 해도 어느새 그냥 다시 돌아보면 '으이그~' 하면서 챙기게 되는 '웬수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 것 같다. (박해가 책에 쓴 말을 빌렸다.)
내가 이렇게 미운 정이 쌓인 사람들에 대한 동경을 가지는 것은 내가 살면서 그 누구와도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마찰이 생길까 싶으면 일이 골치 아파지는 것도 싫고 괜한 일에 신경쓰는 것이 귀찮아질까봐 대충 먼저 참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주는 것을 싫어해서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튀거나 거슬릴만한 행동은 자제해 애초부터 불화의 씨를 짓밟아버린다. 그래서 집에서도 동생들이랑 한번도 싸운 적이 없었고 12년지기 친구와도 지금껏 약간이라도 의견 충돌이 있어 감정이 상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탄한 관계만을 유지하다보니 약간 이제는 이런 아무 기복없이 거의 직선에 가까운 인간 관계 그래프가 지루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하다는 감이 없지않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친구들이 이성친구와 틱틱대며 신경전을 벌인 후 방에서 씩씩거리며 열받아 하는 것을 보아도 왠지 꽤 스릴있고 재미있어 보인다는. ^^;;
어쨌든 정말 오랜 기간동안 고생하면서 소중한 기억들도 많이 만들고 대단한 성과까지 이룬 친구들에게 축하하다고, 그리고 지루해 죽을똥말똥 하던 나에게 잠시동안 재미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할 거리를 선사해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졸업파티 때 만나면 책 잘 읽었다고 이야기해 줘야지. 책까지 그냥 공짜로 갖다 준 박해에게 특히 더!!!
그나저나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바로 블루베리 푸딩 이야기였다. 읽으면서 자꾸 그 당사자들의 표정이 절로 떠오르는데 어찌나 상상을 안하고 싶던지...! ㅠㅠ 내가 푸르딩딩 연두색 책을 열심히 눈알을 돌려대며 읽는 것을 본 현우도 내가 다 읽은 후에 책을 집어들어 새벽 5시까지 책장을 넘겼다고 하는데, 현우 역시 그 푸딩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면서 매우 인상깊었다고 했다. 너무 엽기적인 이야기였어. ㅉㅉ
# by | 2008/02/07 01:45 | Journal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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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딩이야기?? You're such a spoiler. ㅋㅋ
낼이나 모래 대학로에서 만나는거 어때? 뭐 애들 숫자에 연연하긴 해야 하지만 웬만하면 내가 밥 사지 ㅋㅋ
얼마나 엽기적이었길래... 덜덜덜덜
마이구미> 난 하루만에 집으로 왔던데 ㅎㅎ 진짜 꼭 읽어봐!! 재밌어 ^^
루시퍼> 너도 읽어봐 완전 ㅎㄷㄷ
사랑해 웅쌍 ㅋㅋㅋㅋㅋㅋㅋ